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세계, 고양이 / 김현주 - 2관 왕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심사평>
"감각적 문장·세련된 은유로 한층 높인 시의 격조"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도 마감 당일까지 1천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한편 한편이 응모자들의 땀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예심 없이 심사위원 두 사람에게 응모작품이 전달된 것이 12월 중순쯤이었다.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보내고 12월 20일, 심사위원 두 사람은 경인일보 사장실 옆 접견실에서 만나 당선후보자들의 작품을 놓고 협의를 계속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올려놓는 응모작마다 담당 기자가 일일이 인터넷 검색을 해나갔다. 순수 신인이어야 한다는 응모 요강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모든 인쇄매체에 소개된 경력이 있는 응모자는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많은 응모자가 이 조항에 걸려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
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
'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
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
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소/ 김현주 - 2관왕
올라가는 것을 동경한 적이 있나요
덜컥 파랗던 하늘이 정지 영상으로 멈추기 직전까지
가장 먼 곳을 밟기 바로 전
힘차게 발을 뻗는 것과
마음을 멀리 두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어디를 향해 올라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요
롤러코스터와 대관람차를 탈 때
목적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오래전 죽은 나무로 만든
시소 위에 앉아서 말이에요
놀이터는 높이에 묶인 유배지
멀리 떠나지 못한 놀이들이 박혀 있어요
아이들은 숲보다 낮은 그네를 타고
얕은 철봉을 돌아 둥글게 떨어져 내리죠
눈이 없는 기린과 입 벌린 녹색의 악어 사이
차가운 높낮이로 기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도
물이 흐르고 빛은 형체를 그려요
어둡게 올라가는 나는 짧은 시간의 끝에서
당신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가끔,
내려가 보는 거예요
동그랗게 짓이겨진 이끼의 위치 아래
녹슨 용수철과 나비의 날개
매몰된 습지가 자유롭게 부유하며 떠오르도록
발 디딤이 없는 한 칸마다
당신을 향한 깊이가 높이로 기화하고
비명처럼 자라는 어린 잎들이
밤새 날고 있다는 착각으로 웅성거리도록
당신이 내리면 허공,
나는 어느새 제한된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선소감]
지치지 않고 온몸으로 쓰는 사람 될것
쓰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을 떠올리며 걸어왔습니다. 어둡고 희미한 그 길에서, 시는 폐허가 된 나를 낯선 세상으로 거리낌 없이 데려가 주고 때론 밑바닥의 경계까지 몰아붙이며 강렬한 어퍼컷를 날리곤 했습니다. 달콤쌉사름하고 중독적인 그 녹다운의 순간 뒤로, 숨겨진 심연 너머의 진짜 세상이 아른거립니다. 수없이 넘어지더라도 지치지 않고 일어나 걷겠습니다. 모든 순간의 시작과 끝을 똑바로 마주하며 온몸으로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경상일보와 심사위원님, 처음 시의 문을 열어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함께 걷는 시와몽상 문우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차가운 세파 속에서 늘 돌아가 머무를 곳이 되어주는 중재씨와 우리 고양이들,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 김현주
-1973년 서울 출생, 제주 거주
-라디오 작가
-시와몽상 동인
[심사평]
시소의 물리적 속성,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응모작이 투고됐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15명이 투고한 15편이었다.
이들 시편은 저마다 개성적인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음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구체적 경험과 고도로 조직된 언어에 정성을 쏟은 시편들이 호의적으로 찾아왔고,
결국 시상의 참신함과 작품의 완결성,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갈 지속 가능성 등을 두루 참작해
김현주씨의 ‘시소’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소’는 시소가 가지는 물리적 속성인
‘올라감’과 ‘내려옴’이라는 순환성을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이다.
멀리 떠나지 못하고 높은 데를 향하는 시간과 낮고 얕은 곳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그 안에 함께 흐르고 있다.
그러다가 깊이가 높이로 전화되는 순간에 ‘당신’을 발견해가는 사랑의 서사가 아름답게 전해져온다.
시소를 둘러싼 역동적 이미지들을 파생시키면서 자신을 규율해온 시간과 불화하고 화해하는 교차점을 그려냈다고 판단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시소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남겼을 잔상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비교적 긴 호흡 속에 구성하는 만만찮은 비유적 능력을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것이라고 예감해본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시상과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참신함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음에 더 빛나는 결과를 얻기를 기대해본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 유성호
-김달진문학상·편운문학상·대산문학상 평론부문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계속 쓰는 겁니다 계속 사는 겁니다> <신동엽 시 읽기>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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