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동산/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40

2025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대상 - 시/ 파밭-엄경순

파밭  엄경순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꺽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

2025년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당선 시 -이끼의 날들 / 이승애

이끼의 날들  이 승애  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 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 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

202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 모란경전 / 양점순

모란 경전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촉촉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

2025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백야 / 원수현

백야  원수현  창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작아서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사람들은 으레 그랬듯이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작은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로 했어  틈사이로  가진 것들이 보였다 너무도 많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고 많아서 우는 사람들 없어서 우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행함을 하나씩 눈에 넣었지  이곳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빙하를 뚫고 도달한 곳이 빙하라니요! 그곳도 돌았다 빙글빙글 꼭짓점도 결국에는 그대는 미치어 있는가!그대는 미쳐 있던가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뱀을 피해 장대에 올라간다고 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그림자들  우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고 싶..

202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적당한 힘 /김정미(필명 김도은)

적당한 힘  김정미  새를 쥐어 보았습니까? 새를 쥐고 있으면  이 적당한 힘을 배우려 학교엘 다녔고 친구와 다퉜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온갖 소리를 가늠하려 했었던 일을 이해하게 된다  온기는 왜 부서지지 않을까  여러 개의 복숭아가 요일마다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정성을 다해 멍이 들고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를 키운다  서로 다른 힘을 배치하는 짓무른 것들 자세 새로운 패를 끼워 넣고 익숙한 것을 바꿔 넣으면 손을 빠져나간 접시가 깨졌고 칠월이 손에서 으깨어졌고 몇몇 악수가 불화를 겪었다  세상의 손잡이들과 불화하든  친교를 하든  모두 적당한 힘의 영역이었을 뿐  몰래 쥐여준 의심과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있던 새의  기록에서  별똥별을 본다  적절한 힘을 파는 상점들이 있었으면 해 포장도 예쁘게..

202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생각하는 나무 / 이문희

생각하는 나무  이문희  나는 몽상가답게 낙천적이죠 구름모자를 즐겨써요 서서 먹고 서서 자는 동안에도 사색을 즐기죠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그래서 외롭지고 외로운 줄도 모르죠 빽빽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덩굴장미는 용암의 부리에서 분출한 색물성 화산일까 바다가 파도 창고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 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매미에게는 몇 마력 울음의 엔진이 장착된 걸까 또 이런 생각도 해요 하늘에 갇힌 별들은 자유로울까 물고기는 어디를 날아가려 지느러미를 가진 걸까 무지개는 하늘 놀이터의 미끄럼틀 일까 아니면 하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 일까 나는 새들에게 의자를 내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 노래를 하고 싶거나 한 바탕 춤을 추고 싶을 땐 바람 몰이꾼이 되어..

2025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넝쿨은 집으로 가요 / 김지민

넝쿨은 집으로 가요  김지민  꿈이 쳐들어와 며칠째 끌고 가요 뿌리가 박혀 있는 재건축지구로  굴러다니는 벽시계 옆 이불과 옷가지 사이 사하라 장미는 피어 태엽을 작동하고 고양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 무너진 담장을 친친 감아요 마침표를 찍었어도 빈집과 빈집 사이로 길이 지나가요  세발자전거와 두발자전거 사이에 있던 들뜬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  넝쿨은 집으로 집으로 또 집으로 가요  갈라진 벽으로 들어온 찢어진 햇빛 빛과 함께 살아나는 먼지 벽지에서 헤매다 색을 잃어가는 색연필  메뉴판에서 썩어가는 토마토를 불러와 요리해요 어제와 다름없는 지붕을 만들어요 오르톨랑이 차려진 식탁 먹어본 적 없는 맛이 불러온 우리 집  이곳의 하늘이 가라앉을 동안 그늘이 그늘을 부..

202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202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책가도 / 이수국

책가도  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 (冊架圖  )를 세워 월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꽃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꽃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2018년 제2회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편의점의 달 -유정남

편의점의 달유정남 편의점에 달이 뜬다밤의 뚜껑을 따고 나온 번데기들이 간이 테이블에 앉아별을 마신다컵라면에 뜨거운 국물을 부어주면굳은 혀들이 깨어나 풀어놓는 매콤한 언어들풀어진 넥타이 하나 보름달로 행운의 즉석복권을 긁는다구름으로 채워진 함량 미달의 과자 봉지들은팽팽히 헛바람으로 부풀어 있다차갑게 식은 유리병들의 마개를 따거나삼각형을 베어 먹으면 동그라미가 될 거라 했지만조각 난 아이들은 달빛 우유나 몇 갑의 담배를 훔쳐 달아났다태어날 때부터 몸에 찍힌 바코드를 지울 수가 없어서아르바이트는 천직이 되었다김밥들은 자정을 기다려어제라는 유통기한을 지우고 폐기된 하루를 위장에 채워주곤 했다어느 날 사막으로 걸어간 아버지는불 꺼진 도시의 별을 지키는 편의점이 되었지가시뿐인 손목에 걸린 시계가 늘 가리켜주던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