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동산/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40

202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 구 일째 / 황정희

구 일째 / 황정희 ​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 한 할며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나간 지도 구 일째 ​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매매 반듯하게 기다리고 있다 ​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똑똑 ​ 빗소리다 ​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 202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2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활어/ 황사라​

202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활어/ 황사라 ​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가장 낮은 곳의 말言/ 함종대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장 낮은 곳의 말言/ 함종대 ​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은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통통 부어오른 날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잘라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 내어놓는 울음인지..

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세계, 고양이 / 김현주​

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세계, 고양이 / 김현주 - 2관 왕 ​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책을 끓이다 /장현숙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책을 끓이다/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

2023 한경 신춘문예 시 당선작-​당산에서 / 신나리​

2023 한경 신춘문예 詩 당선작 ​당산에서 / 신나리 ​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

202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버터 / 박선민​

202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버터 / 박선민 ​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쏘가리, 호랑이 /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