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동산 196

전남매일 김미경의 시 이야기 -나사/ 송승환

나사 송승환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 에서는 눈부신 햇살도 죄어들기 시작한다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은 새들을 몰고 와 쇳소리를 낸다 그 속에 기름 묻은 저녁이 떠오른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그만큼 깊어지는 어둠 한번 맞물리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떠올랐던 별빛마저 쇳가루로 떨어진다 얼어붙어 녹슬어 간다 봄날 빈 구멍에 새로운 산골이 차 오른다 제 10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시평 http://www.jndn.com/article.asp?aid=1747294363409611206 김미경의 시 이야기-나사나사 송승환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 에서는 눈..

전남매일 김미경의 시 이야기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박노해중략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그토록 강렬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무력할지라도 끝끝내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최후의 한 사람은최초의 한 사람이기에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충분한 것이다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삶은 기적이다인간은 신비이다희망은 불멸이다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박노..

전남매일 김미경의 시 이야기 -감자의 둥지 / 안광숙

감자의 둥지  안광숙  땅속 깊은 곳까지 봄을 심은 건 누구일까  산책 나온 달이 갓 출산한 감자꽃에 머물다 가는 밤  하얀 스위치 같은 저 꽃잎을 켜서 줄기를 타고 내려가면  알 밴 감자들이 세들어 살고 있을거야  둥근 알들끼리 툭, 하고 어깨를 부딪혀도  상처가 나지 않아 마데카솔이 필요없는 땅속 마을  날카로운 아카시아 뿌리가 신경줄기를 건드려도  거참, 너털웃음 한번 웃고 나면  맛나게 풀리고마는 순박한 이들의 터,  저 깊은 땅 밑에도  흙으로 막걸리를 빚어 미소를 틔워주는 지렁이가 있고  짠눈물과 더 고소하게 퍼져가는 사랑이 자라난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서 있는 땅이 꼬물거린다  땅속의 소식을 알려주듯  갈라진 뒷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올라오는  따스한 이야기가 사는 마을  장난치던 바람이 ..

2025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대상 - 시/ 파밭-엄경순

파밭  엄경순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꺽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

2025년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당선 시 -이끼의 날들 / 이승애

이끼의 날들  이 승애  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 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 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

202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 모란경전 / 양점순

모란 경전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촉촉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

2025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백야 / 원수현

백야  원수현  창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작아서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사람들은 으레 그랬듯이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작은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로 했어  틈사이로  가진 것들이 보였다 너무도 많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고 많아서 우는 사람들 없어서 우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행함을 하나씩 눈에 넣었지  이곳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빙하를 뚫고 도달한 곳이 빙하라니요! 그곳도 돌았다 빙글빙글 꼭짓점도 결국에는 그대는 미치어 있는가!그대는 미쳐 있던가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뱀을 피해 장대에 올라간다고 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그림자들  우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고 싶..

202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적당한 힘 /김정미(필명 김도은)

적당한 힘  김정미  새를 쥐어 보았습니까? 새를 쥐고 있으면  이 적당한 힘을 배우려 학교엘 다녔고 친구와 다퉜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온갖 소리를 가늠하려 했었던 일을 이해하게 된다  온기는 왜 부서지지 않을까  여러 개의 복숭아가 요일마다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정성을 다해 멍이 들고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를 키운다  서로 다른 힘을 배치하는 짓무른 것들 자세 새로운 패를 끼워 넣고 익숙한 것을 바꿔 넣으면 손을 빠져나간 접시가 깨졌고 칠월이 손에서 으깨어졌고 몇몇 악수가 불화를 겪었다  세상의 손잡이들과 불화하든  친교를 하든  모두 적당한 힘의 영역이었을 뿐  몰래 쥐여준 의심과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있던 새의  기록에서  별똥별을 본다  적절한 힘을 파는 상점들이 있었으면 해 포장도 예쁘게..